본문 바로가기

고운님글과 사진 ~*

천양희 시

새가 있던 자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진실로 좋다

                                   

노을에 물든 서쪽을 보다 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진실한 사람이 좋은 것처럼

좋다 눈으로 든다는 말보다 마음으로

든다는 말이 좋고 단풍 든다는 말이

시퍼런 진실이란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노을에 물든 것처럼 좋다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

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

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

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나무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

 

나는 세상에 든 것이 좋아

진실을 무릎 위에 길게 뉘었다

 

시는 나의 힘

 

시힘 동인 시낭송회 가서 시의 힘 얻고

돌아오던 날 힘차게 달리는 지하철에서

모든 힘센 것 중에 시의 힘이 으뜸이지 하다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게 시라고

아, 눈물만이 희망이지 하다가

침묵에 사다리를 놓는 게 시인이라고

누가 나더러 끝도 없는 그 짓을 왜 하지? 할 때마다

고통은 둘레가 없어 안을 수도 없네 하다가

정신에 절정 없고 몸에 완전이란 없으므로 시작(詩作)이란

시작부터 시인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지 하다가

시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지도인데

누가 나더러 시는 왜 쓰냐고 다시 물으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힘없는 나에게 아, 시만이 힘이지 하다가

자작(自作)나무 밑에 엎드려 나는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

 

옷깃을 여미다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그자는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귀하려다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수락산

 

  능선이 먼저 바람을 맞는다 숲 아래 그늘 길고 소나무 한자리에 우뚝하다 바위는 언제나 무덤덤 굳센 저것이 부성(父性)일까 온갖 잡목들 무명초들 어치들 모여 있다 숨은 꽃들 그늘 뒤에 숨어서 피고 박새는 빠르게 둥지를 옮긴다 나도 오늘 나를 옮긴다 너무 오래 걸어온 발이 솔숲에 머문다 솔바람소리 잠시 나를 당긴다 저 소리는 소나무가 적어 놓은 바람경이다 사람들은 다투듯 산에 들고 물은 무심한 듯 산을 버린다 들고 나는 것이 저 자리밖에 더 있을까 누구든 빠져드는 무진장계 오늘은 새소리가 명곡 같다 굽은 나무들이 선산을 지킨다고 우선 한곡조 뽑는다 해 지기 전에 나는 당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걸 넘는다고 당장 마들이 나올까 솔새 날아가다 자리를 바꾼다 도계 가는 길 아직 멀고 상봉은 높으나 정상이 아니다 물끄러미 산 한번 올려다본다 마음이 또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온다 산이 가파른 듯 내가 가파르다 삶을 수락하라는 듯 마들을 다 지나고서야 겨우 수락산에 든다

'고운님글과 사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화 /김종삼  (0) 2015.09.20
연기/브레히트  (0) 2015.09.20
여름  (0) 2014.08.06
연우글  (0) 2014.06.18
국립공원 사진 작품  (0) 201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