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한 사물을 기억해 낼 때 따라오는 것은 이미지로 다가오지요. 먼 기억일수록 이미지의 선명함은 색깔이거나 소리이거나 모양(거칠거나 부드럽거나 크거나 작거나)일 것입니다. 그에 내 느낌을 얹어 이미지로 간직하게 되고, 무의식의 바닥에 켜켜이 쌓아놓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세계에서 무한히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를 한다고 할 때는,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와 마주하는 일일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를 깨부수고, 반전의 시각도 감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인은 세상의 시각이 아니고, 각자의 사물의 본질의 시각(사물의 입장)에서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니, 시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삶의 이해와 깊이도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지난 주, 시 강의 담론에서 다층적이고 이중성의 내포를 담고 있는 시가 깊은 시라 했지요. 시에 이미지가 그려져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기본 요소이지만, 더 욕심을 낸다면 그 이미지들의 다양한 느낌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주제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의식에 의지되어 있거나 현의식의 상념이 떠오를 때 자신의 사유의 넓이와 깊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 마지막 퇴고할 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시가 늡니다. 예를 들면, ‘봄바람’이 주제라면 계절적인 봄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지루하고 긴 시간의 문제, 아름다운 사계의 서막, 희망과 소생, 매섭고 뜨거운 격정의 겨울과 여름을 잇는 터미널, 삶의 춘몽을 깨우는 등의 이미지에서 이중의 은유적 표현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리움’ 이 주제였다면 ‘그리움’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지요. 식어져 멀어진 것입니다. 아직 뜨겁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고 싶은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뜨거운 것은 옆이 있어 만져지고, 지각 가능한 것이지만, 차가운 것은 옆에 없는 멀어진 이미지이지요. 따라서 그리움의 상태는 시간의 경과가 수반되고 이성적 생각이 개입될 수 있는 시점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뜨거운 시절은 짧고, 식어진 차가운 시간이 많지요. 따라서 ‘그리움’이란 주제로 접근하려면, 차갑고 멀어지고 아련하게 오고 가는 느낌의 상태를 포착해야 하겠지요. 고통이나 열정의 온기가 남아있는 상태는 아픔이지, 그리움으로 엮기에는 뭔가 어색하다는 것이지요.
아래의 박형준의 시에서 시어가 내포하는 이중성을 생각하며 한번 감상해 봅시다.
개밥바라기 / 박형준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매일 누워 운신을 못 하는 노인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초저녁 창문에 먼 데 낑낑대는 소리,
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배고픈 개의 밥바라기 별을 올려다본다.
까칠한 개의 혓바닥이 금이 간 허리에 느껴진다.
깨진 토기 같은 피부
초저녁 맑은 허기가 핥고 지나간다.
새
그가 죽은 뒤
새로 문을 발라
뜰찔레꽃 곁에
기대놓자,
창호지에 비친 새 날아간다
너덜너덜한 창호지
뜯어내자, 침묵이 홀가분하게
바람에 떠오른다
들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창호지만 바라보던 그가,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맴돌던 그가,
줄기에서 줄기로 넘나들며
마당의 꽃자리 흔들다가
저녁 연기 타고 날아간다
뜰찔레꽃 곁에
저녁 향기 퍼지며
자신의 인생을 축약한 듯
마당의 하늘 위
고통이 날아간다
홍시
뒤뜰에서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밤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에
아버지처럼 누워서 듣는다
얇은 벽 너머
줄 사람도 없는디
왜 자꾸 떨어진대여
힘없는 어머니 음성
아버지처럼
거그, 하고 불러본다
죽겄어 묻는 어머니 말에
응 나 죽겄어
고개를 끄덕이던
임종 가까운데
자식 오지 않고
뻣뻣한 사지
이불 밖으로 나온 손
가슴에 얹어주던 어머니
큰방에 누워
뒤뜰 홍시처럼 가슴에
둥글게 주먹 말아 쥐고
마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 소리 듣는다
별식(別食)
빗속에서 밀가루 떡 냄새가 난다.
창을 활짝 열어둔다.
어린 시절 머리말에 놓인
밀가루 떡 한 조각.
동구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점심 무렵 돌아와
막내를 위해 만들어주던 밀가루 떡.
누군가의 머리맡에
그런 시 한편 슬몃 밀어놓은 날 있을까.
골목의 빗속에서
아무 맛도 없이 불풀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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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