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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스크랩] 11월에 관한 시

            11월에 관한 시

 

    그리운 편지 ㅡ이응준

    남산, 11월 ㅡ 황인숙

        내가 사랑하는 계절 ㅡ 나태주

        노숙 ㅡ 박진성

     다시 11월 ㅡ 박영근

     마음의 정거장ㅡ 김명인

        무등차 ㅡ 김현승

     11월 ㅡ 고은. 고재종. 나희덕. 박영근.서정춘.유안진.

                   이서린. 이성복.이외수. 이해리.

                   정끝별. 조용미. 최갑수.최정례.황인숙

        11월 , 다섯줄의 시 ㅡ 류시화

        십일월, 배밭을 지나며 ㅡ 조용미

        11월에 ㅡ 정채봉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ㅡ 정희성

        11월의 나무 ㅡ 도종환. 황지우

        11월의 나무처럼 ㅡ 이해인

        11월의 노래 ㅡ 김용택

        11월의 느티나무 ㅡ 목필균

        11월의 벽화 ㅡ 이사라

        11월의 비가 ㅡ 정대구

        11월의 숲 ㅡ 심재휘

        11월의 어머니 ㅡ 윤준경

        11월을 빠져나가며 ㅡ 정진규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ㅡ 김동규

        11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ㅡ 최하림

        11월 저녁 ㅡ 정수자

     입동 ㅡ 김영근.김춘수.이외수. 한혜영

        입동 이후 ㅡ 이성선

        입동 저녁 ㅡ 이성선

     하늘색 나무대문집 ㅡ 권대웅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 도시에서 11월은 정말 힘들었네

그대는 한없이 먼 피안으로 가라앉았고

나는 잊혀지는 그대 얼굴에 날 부비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에 대하여

덧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렸지만

무엇이 우리 주위에서 부쩍부쩍 자라나

안개보다도 높게 사방을 덮어가는가를

끝내 알 수는 없었네

 

11월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던

그 도시에서 그대가 가지고 있던

백 가지 슬픔 중에

아흔아홉으로 노래 지어 부르던

못 견디게 그리운 나는

 

 

 

 

     남산, 11월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앙ㅍ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새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울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슬픔에 손목 잡혀서> 시와 시학사.

 

 

 

 

      노숙          박진성

십일월 은행잎에 누웠다

새벽 고요 부서지는 소리

응급실보다 환했다

아스팔트 뒤덮은 잎맥들은 어느 나라로 가는 길인가

등짝에 달라붙은 냉기를 덥히느라 잎들은

분주하다 갈 곳 없는 내력들처럼

잎잎이 뒤엉킨 은행잎 사원에서 한참을 잤다

사랑할 수 없다면 마지막 길도 끊어버리겠다

은행잎 한 잎, 바스라져 눈가에 떨고 있었다

 

 

 

     

   다시 11월          박영근

꽃 떨어진 그 텅 빈 대궁에 빗물이 스쳐간다

 

이제 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람뿐

 

시 한 줄 없이 바람 속에 시들어

눈 속에 그대로 매서운 꽃눈 틔우리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비.1997년

 

 

 

 

 

 

      마음의 정거장         김명인

집들고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

때 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편에 널 세워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 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듯

잎잎이 놓아버려 텅 비는 하늘

 

 

 

무등차         김현승(1913 - 1975)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양 마음에 젖는다

 

 

 

 

 

    11월         고은

아무도 없어서는 안된다

서 있는 것들은

저바다 빈 나무로 서 있고

나도 그들과 함께 서서

오래오래 묵은 소리로

우수수 우수수 몰려가는

이 세상의 여호와여 낙엽이여

내가 서서 빈 나무 되어도

나무는 나무끼리

더 이상 가깝지 않게

나무 사이의 어린 나무에게

흐른 하늘을 떼어 준다

바람 속에서 바람도 몸임을 알아라

바람으로 태어나

내 아들로 여호와로

이 황량한 곳을 살게 하누나

아무도 없어서는 안된다

빈 나무끼리 서서

너이들 없이

어찌 이세상 壁靑으로 녹이 슬겠느냐

진 잎새 제 뿌리 위를 덮고

사람들도 설움도 그 일부는 덮었구나

 

                            헨리 무어 ㅡ 왕과 여왕

 

 

 

   11월                 고재종

갱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고니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에 갈대숲에서 기어나와 마음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때다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에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넣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벤허  1959년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1월                 박영근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11월           서정춘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때기가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월

 

 

 

 

 

 

  11월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이문재

서편 하늘 한줄기 은색 비행운 동남에서 서북으로 길다

남쪽 사투리 쓰시던 새어머니 오른쪽 귀 위에 나있던 한 올 새치 같다

김포대교 건너면 하류 쪽으로 날아가는 갈매기들의 하얀 가슴살을 보았다

홍건한 놀빛 성난 듯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둘째형까지 낳으신 어머니도 스스럼없이 오신다는 동짓달 제삿날

셋째형네 고층 아파트에 모여 마감뉴스까지 다 본 뒤에

재배, 또 재배

음복, 또 음복

 

 

 

 

                                       

      11월                    이서린.경남 마산. 1995년 경남 신문 신춘문예 등단.

낙엽처럼 불면이 쌓이는 날이 많아졌다

종종 새벽녘에 비가 흩뿌리는 날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느낌에

유서 같은 일기를 두서없이 쓰기도 한다

가끔 안주도 없이 술을 털어 넣듯 마시다

미친 듯이 밤길을 휘적휘적 걷다가

한 사람 안에 웃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하다

모든 걸 게워내듯 오래오래 울기도 하는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식구들의 밥을 차리고

빨개진 눈으로 배웅을 하고

꾸역꾸역 혼자 밥 먹는, 이 슬픈 식욕

그래도 검은 커피를 위로 삼아

마당에 빨래를 넌다

조금씩 말라가는 손목은 얇은 햇빛에 맡기고

흐르는 구름을 보다 눈을 감으면

툭, 떨어지는 감나무 잎

세상은 저렇게 떠나야 하는 것

조만간 가야 할 때를 살펴야 하는 것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지는 해는 왜 붉은가를 생각하다가

흉터는 왜 붉은가를 생각해보는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저무는 하늘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찬물에 손을 담고 쌀을 씻는다

 

 

 

 

     11월              이성복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 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황모파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11월            이안

나뭇잎 벗겨지자

노랗고 향긋한 냄새를 품은 산의

무덤 하나 둘

깨어나 마을로 들어선다

저, 잘 익은 발걸음 소리 들으며

오래 묵어 기운 집 뜰에

몇 일 모과가 빛난다

 

 

 

 

 

  

 

   11월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마에스트로

 

 

            

  11월            이해리

끝끝내 닿지 못할 막막함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달력 속의 날짜, 11월

산막처럼 텅 빈 글자의 행간으로 가을은

차츰 침묵의 심지를 낮춘다

거리에 나서면 바람이 끌다버린 나뭇잎 우수수

목조 벤치 아래 굴러 다니고

아직 채 옷깃 여미지 못한 목덜미 속으로

방촌역 차단기 앞에 멈춰 선 저녁 안개 감겨온다

시간이여 계절이여

꿈꾸었던 것들과 제때에 닿는 일 드물고

모든 소원하는 것들은 뿔뿔 흩어지거나

뒤늦게 이루어졌다

홑이불처럼 가난한 마음 위에

누덕누덕 그리움만 차 오르고

빈 수레 가득 흰 이슬 날리며 바람ㅂ떼는

어느 멀고 나지막한 마을로 떠나간다

바닥 드러낸 등잔처럼 희미한 내 그림자

막다른 골목처럼 서늘히 서 있는데

 

 

 

 

  11월           정끝별

기와를 넘는 개오동나무 그늘은 살얼음을 만들지

밤이면 바람은 웅웅 얇은 창호지문을 흔들어

어린 영혼에 커다란 손자국을 내고 지나갔지만

유독 빈 축사에 가득했던 갓 구운

한낮의 햇살을 좋아했어 호박오가리처럼 앉아

검은 옷자락에 싸여있던 白木의 수녀원 앞들과

잿빛 장삼을 끌고가는 맨머리가 무서워

울곤 했어 스스로를 감추려고 푸른 이끼를 덮어쓴

얼음 같았던 사람들

낯선 것들은 그렇게 세상 밖에 있었던 거야

오일장이면 얼굴에 회칠을 한 미친 여자는

여자만 보면 욕을 했어 머리가 숭숭 빈

문둥이나 걸인도 많아 나는 턱숨세워

달리곤 했지 한결같이 웅크린 채 좁아만 들던

그 길에서 엄마 손을 놓칠 때마다 덮쳤던

아모레 아모레미오 노란 꽃 낯선 것들의 오한

다투는 소리 뿌연 쌀먼지로 일던 네거리 정미소집에

굳게 닫혀있던 긴 욕설들 누구였을까

유난히 그늘 깊은 영산강물에 담댕이 햇살에

함부로 나를 심더니 통채로 뽑아버린 일곱 살

가시처럼

낯설어 멀기만한 그 십일월

 

                      밀라노 두오모 성당

 

 

  11월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11월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십일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십일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 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십일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데

 

                                           직박구리

 

 

   11월            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빚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11월                 황인숙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11월 다람쥐       고형렬

겨울이 오는 것을 알거야

창자는 눈과 귀와 또 다르니까

낙엽에 떨어지는 눈을 피해

다람쥐는 창자를 따라갈거야

가을이 모르는 길을 찾아

바람은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착한 생명처럼 작은 창자는

다람쥐 몸속에 긴 하나의 줄처럼

눈오는 나라에서 잠들거야

가는 눈썹을 정지한 채 땅속에서

 

 

 

   11월, 다섯 줄의 시         류시화

차가운 별

차갑고 멀어지는 별들

점점이 박힌 짐승의 눈들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는 옛날의 애인

아, 나는 11월에 생을 마치고 싶었다

 

 

 

               

 

    십일월, 배밭을 지나며            조용미

십일월의 과수원

배나무에 열린 배를 덮고 있던 흰 종이 누런 종이들이

만장처럼 매달려 펄럭인다

먼 데서 보면

흰 꽃들이 소복이 피어 있는 듯

 

십일월의 과수원은

배를 갓처럼 싸고 있던 흰 종이들이

배나무가 순산을 하듯

탯줄을 끊고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어쩔 줄 모르고 나부끼고 있다

 

빈 가지마다 거두지 못한 태반처럼

종이들이 남겨져 펄럭이고 있다

다 늦은 가을 흰 꽃들은 피어서

큼직하게 매달렸던 배들이 떨어지고 난 자리에

흰 꽃들은 피어나서

 

바람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스산한 흰 꽃들은 난만히 피어나서

눈이 내리는 듯한 세상이 가고 또 오는 듯

펄럭, 펄럭이고 있다

눈송이들이 멀어지며 작아지고 있다

<현대시> 2009년 2월호

 

 

 

                    

 

 

   11월에              정채봉

만추면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

화장 지우는 여인처럼

이파리를 떨구어 버리는 나무들 사이로

차가운 안개가 흐르고

텅 비어버린 들녘의 외딴 섬 같은 푸른 채전에 하얀 서리가 덮이면

전선줄을 울리는 바람 소리 또한 영명하게 들려오는 것이어서

정말이지 나는 이 11월을 좋아하였다

삶에 회의가 일어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도

찬바람이 겨드랑이께를 파고들면  '그래 살아보자'하고

입술을 베어 물게 하는 달도 이달이고

가스 불꽃이 바람 부는대로 일렁이는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의 싸아한 진맛을 알게 하는 달도 이달이며

어쩌다 철 이른 첫눈이라도 오게 되면

축복처럼 느껴져서 얼마나 감사해한 달인가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11월의 나무       도종환

십일월도 하순 해 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

거기다 철 이른 눈이라도 내려

허리 휘어진 나무들의 모습은 숙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는 건 이 때다

알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날들의 시작이

서늘하고 탁 트인 그림이 되는 건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11월의 노래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월의 느티나무                 목필균

점점 체온을 잃어가는

너를 위해

햇살 한 줌 뿌려본다

 

추워질수록 걸친 옷가지

훌훌 벗어 던지는

자학의 몸짓들

 

다 쓸려 사라져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길을

뿌리로 서서

 

너는 시린 바람 안으로 채우며

한 해의 칼 금을 긋고 있구나

  

 

 

 

 

  

 

  11월의 벽화          이사라

11월엔 누군가 가고 오는 마음을 불러

흰 벽에 세운다네

마음이 드디어 두 줄기 긴 눈물을 흘리고

눈물의 길 안으로 들어가는 적막 끝에서

두 개의 뼈가 지상에 집을 세우고

흔들리던 이야기들을 멈추게 한다네

그러면

밤마다 사랑으로 풀어질 수 있는 사슬들이

흰 벽에 거릴고

하늘에 사다리를 놓는 영혼이 찾아든다네

산다는 기쁨의 수수께끼를 풀 듯

쌍무지개가

상처를 배경으로

둥글게 걸린다네

 

11월엔 숲속의 나무들 집처럼 서 있고

11월엔 우리들 두 겹 세 겹 만나고

11월엔 누구나 누군가를 새긴다네

 

                                            체코   프라하   비투스 성당의 장미의 창

 

           

 

 

                

11월의 비가            정대구

우수수 하루 종일 흔들리는 11월의 찬비

줄 끊긴 비파 비파비파 아랫도리가 썰렁하다

두꺼운 얼굴의 겨울이 몇 걸음 앞당겨

성큼 성큼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여 빠르게 길을 몰고 가는 저녁

강원 영동과 중북부 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데

이곳 경남지방은 웬 비가 비비비悲悲悲

 

                               내장산

 

                                                       

 

 

 

 

11월의숲                심재휘

가을이 깊어지자 해는 남쪽 길로 돌아가고

북쪽 창문으로는 참나무 숲이 집과 가까워졌다

검은 새들이 집 근처에서 우는 풍경보다

약속으로 가득한 먼 후일이 오히려 불길하였다

날씨는 추워졌지만 아직도 지겨운 꿈들을 매달고 있는

담장 밖의 오래된 감나무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나는

숲이 보여주는 촘촘한 간격으로 걸어갈 뿐이다

 

여러 참나무들의 군락을 가로질러 갈 때

옛사람 생각이 났다 나무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자꾸 몸을 뒤지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느 것은

길쭉하거나 둥근 낙엽들의 기억에 관한 것밖에는 없다

나는 내가 아는 풀꽃들을 떠올린다

천천히 외워보는 지난 여름의 그이름들은 그러나

피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에만 해당한다

가끔 두고 온 집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한때의 정처들 어느덧 숲이 되어 가는 폐가들

일찍 찾아온 저녁의 기운에 낙엽 하나가

잔 햇살을 보여주기도 감췩도 하며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 규칙을 궁금해하지만 지금은

낙하의 유연함을 관람하기로 하는 때 그리하여

나는 끝없이 갈라진 나뭇가지의 몸들을 만지며

내가 걸어가는 11월의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뿐이다

 

 

 

 

11월의 어머니       윤준경

11월 들판에

빈 옥수숫대를 보면 나는

다가가 절하고 싶습니다

줄줄이 업어 기른 자식들 다 떠나고

속이 허한 어머니

 

큰애야, 고르게 돋아난 이빨로

어디 가서 차진 양식이 되었느냐

작은애야, 부실한 몸으로

누구의 기분 좋은 튀밥이 되었느냐

둘째야, 넌 단단히 익어서

가문의 대를 이을 씨앗이 되었느냐

 

11월의 바람을 몸으로 끌어안고

들판을 지키는 옥수숫대

 

날마다 부뚜막에 밥 한 그릇 떠놓으시고

뚜껑에 맺힌 눈물로

집 나간 아들 소식을 들으시며

죽어도 예서 죽는다 뿌리에 힘을 주는

11월 들판에 강한 어머니들에게

나는 오늘도 절하고 돌아옵니다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내리는 눈이라도 기념으로 맞아두자

마른 풀대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무와 나무들 사이가 분명해지고

강가에 서면 흐르는 물소리들도 한껏 야위어 속살 다아 보인다

서로 벌어져 있다

가장 견고하다는 네 사유의 책갈피도 여며지지 않는다

머물렀다고 할 수 없다

서둘러 11월은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트로이의 목마

 

 

11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최하림

11월이 지나는 겨울의 굽이에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골짜기는 입을 다문다

토사층 아래로 흘러가는 물도 소리가 없다 강 건너편으로

한 사내가 제 일정을 살피며 가듯이

겨울은 둥지를 지나 징검다리를 서둘러 건너간다

시간들이 건너간다

시간들은 다리에 걸려 더러는 시체처럼 쌓이고 더러는 썩고 문드러져 떠내려간다

아들아 너는 저 시간들을 돌아보지 말아라

시간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나둥그러져 있을 뿐 ...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 미로 같은 안개가 강을 덮는다

우리는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아직도 골짜기에서는 나무들이 기다리고 새들이 기다리고  바람이 숨을 죽인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 한다

 

 

 

                            

 

11월 저녁         정수자

다 해진 길을 끌고 가을이 가고 있다

목마다 목이 시린 시래기 같은 시간들

그어귀 외등을 지나는

당신 등도 여위겠다

가으내 비색에 홀린 바람의 당혜 같은

귀 여린 잎사귀도 먼 곳 향한 귀를 접고

제 안의 잎맥을 따라

한 번 더 저물겠다

 

          앤 해서웨이(1982 - ) 미국

 

                          

    입동             김영근                             입동 ㅡ11월 7일

플라타너스 가지 끝에 고양이 몇 가르릉거린다

바람이 불면

갈색이거나 검은 몸을 가지에 바싹 붙이며

더 앙칼지게 가르릉거린다

몰려오는 어둠이 죄다 쥐떼로 보였는지

몸을 날리려 하지만

뛰어내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밤 내내 가르릉거린다

어미는 어딜 갔을까

밤 깊어 바람 차가울수록

울음은 송곳니처럼 자라나

내 꿈을 찢고 들어온다

 

나는 내 시체를 보고 울고 있었다

죽도록 해도 이룬 일 하나 없어

울음은 차츰차츰 통곡으로 변하고

그 소리에 놀라 문득 깨니

올라온 기억이 없는 이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떻게 내려갈지 몰라 죽은 어미를 찾으며

 

나도 한밤 내 가르릉거리고 있다

 

 

 

 

 

    입동          김춘수                      입동 ㅡ 11월 7일

낙엽들이 길섶에 슬린다

햇살이 햇살의 웅덩이를 만든다

여기 저기

잎 떨군 나무들

키가 더 커지고

조금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너무 먼 하늘이

귀에 쟁쟁하다 그

목 잘린 무쇠두멍

 

 

 

    입동               이외수

달밤에는 모두가 집을 비운다

잠 못들고

강물이 뜨락까지 밀려와

해바라기 마른 대궁을 흔들고 있다

밤 닭이 길게 울고

턱수염이 자라고

기침을 한다. 끊임없이

이 세상 꽃들이 모두 지거든

엽서라도 한 장 보내라던 그대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서

지금 쓸려가는 가랑잎 소리나 듣고 살자

나는 수첩에서 그대

주소 한 줄을 지운다

 

 

 

   입동                   한혜영

몸집에 비해 유난히 가느다란 다리로

삐뚤빼똘 궁둥이를 놀려대며 걸어가는

저런 닭들

어디서나 흔히 봤다

재래식 시장 혹은 유원지 화장실

늘어진 네 박자로 삐뚤빼똘 걸어가다

한 목청 쑥 뽑아 올리던 늙은 닭들

비로소 자유롭게 궁둥이 흔들어대며

떠나가는 닭들을 본 적이 아주 많다

깃 세울 일도

볏 세울 일도 더는 없는

털 반쯤이나 듬성듬성 빠져버린

저 닭!

저 붉은 털을 가진 단풍나무 뒤를

삐뚤빼똘 따라와서

나 오늘아침 입동에 당도한다

무수한 닭들

지나가다 한번쯤은 서성였을

 

           

 

 

 

 입동이후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입동저녁       이성선

벌레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도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 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

 

 

 

 

 

   하늘색 나무대문 집                 권대웅(1962 - ) 서울

십일월의 집에 살았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얼키설키 모인 집들과 몇 개의 텃밭을 지나

막다른 골목 계단 맨 끝 문간방

그집에서 오랫동안 가을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창문 밑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팔꽃. 해바라기

저녁의 적막을 어루만져 주던 가문비나무

가끔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가 슬픔을 가려주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담장 너머 이어지던 지붕과 지붕들

그 위로 햇빛이 만들어놓던 빛나던 개울들

황금여울을 따라 저녁의 끝까지 갔다 왔습니다

돌아오면 처마 밑 어둠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선가 쌀 일구는 소리 너무 커 적막해라

눈을 감고 술렁이는 내 마음 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긜운 것이 너무 많아 불을 켜기 힘든 저녁

하늘색대문을 열고 나가

해바라기가 서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나팔꽃 까만 눈동자처럼 한 시절 야물딱지게 맺히고 싶었습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신우초등학교 

 

출처 : 동해물과 백두산이
글쓴이 : 아침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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